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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1483~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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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27. 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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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1.1.3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교황으로부터 파문 당하다


1521년 1월 3일, 독일의 성직자 마르틴 루터는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청천벽력과도 같은 파문 처분을 받는다.

그 당시 성직자에게 파문은 성직이 박탈됨과 동시에 교회에는 출석도 할 수 없고,그 안에서 장례식도치를 수 없게 되는 것으로 참으로 치명적인 벌이었다. 이 사건은 훗날 중세를 마감하고 근대를 여는 계기가 된다.


종교의 근대가 시작되다


마르틴 루터의 성직 박탈이 오늘날 전 세계에 가장 널리 퍼진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탄생을 가져오리라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철옹성 같은 권위를 무너뜨리고, 수많은 개신교 종파의 효시가 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에까지 개혁의 바람을 일으킨 루터의 혁명적인 정신은 르네상스 이상으로 근대를 여는 중요한 열쇠였다. 신대륙의 발견과 산업 발달로 육체가 근대화되었다면, 르네상스로 정신이 새 옷을 입었고, 프로테스탄트 탄생으로 영혼이 비로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개척자라 할 수 있는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 주의 아이슬레벤에서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ther)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하면서 득세한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을 법률가로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마르틴은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해 교양 과정을 마치고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마르틴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사건이 이 시기에 터졌다. 1505년 7월 2일, 마르틴이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슈토테르하임 근처에서 무시무시한 벼락이 그 바로 옆에 떨어진 순간 마르틴은 하늘의 무섭고도 은혜로운 힘을 느꼈다. 그는 땅에 엎드리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불렀다. “성 안나여, 저에게 힘을 주소서. 저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마르틴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같은 달 17일,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1507년 사제(司祭)가 되었고, 1511년 비텐베르크 대학교로 옮겼으며, 1512년에는 신학박사가 되었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했다. 1515년 마르틴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열 곳을 감독하면서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경 연구에 전념했는데, 면죄부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발견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의 구원을 어떤 개인의 손에 일임하지 않았음을 확신하고, 인간의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돈으로 죄를 면할 수 있다니···


1517년 10월 31일, 루터의 인생을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은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으로 돈을 받고 죄를 면해주는 면죄부(免罪符) 판매 등 교회의 부당한 처사를 비판하는 문서를 전격 게시한 것이다. 당시 면죄부 판매는 교회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는데, 교회의 일에 대한 비판은 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루터의 항거는 당연히 폭풍 같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즉각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애당초 학자들 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천둥이 사방에서 동시에 울려 퍼지듯이 삽시간에 독일 전역은 물론 전 유럽을 강타했다. 95개 논제 발표 후 약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 로마 가톨릭 교회는 루터를 견제하기 위해 그에게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모임에서 그의 주장을 소개하도록 요구했다. 그 결과 루터의 주장은 오히려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 온 세상에 전해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은 한층 더 고조되었고, 수많은 루터의 추종자가 생겼다. 

1519년 7월, 성직자 요한 에크와 라이프치히에서 벌인 논쟁은 루터가 교황의 눈 밖에 나는 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파문의 직접적인 단초가 되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구원받기 위해 교황을 인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며, 에크가 주장하는 ‘로마 교회에 대한 순종(Romana obedienia)’보다 자신의 입장이 더 기독교적이고 참된 의미에서 보편적인 교리라고 주장했다. 에크는 라이프치히 논쟁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루터의 불온한 주장을 교황에게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은 1520년 6월 24일 발표된 교서에서 앞으로 60일 이내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동료 모두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루터는 12월 10일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뿐만 아니라 로마 교회 법전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으로부터 영원한 추방을 선고받았다. 이미 예견된 것이었지만 파문은 루터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루터의 마음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면죄부의 오용으로부터 로마 교황을 보호하는 일이 그 권위를 세워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달려온 루터는 자신의 신념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1521년 신성로마제국 의회는 루터에게 주장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제국에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그는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로써 그는 성서의 대중화뿐만 아니라 독일어 통일에까지 지대한 공헌을 했다.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 머무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에서는 카를슈타트(본명은 Andreas Bondenstein)가 이끄는 과격분자들이 급격한 혁신 운동으로 이른바 ‘비텐베르크 소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미사 폐지, 평신도에 대한 성배(聖杯) 부여, 성상(聖像) 파괴 등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이 개혁 운동의 논리적 귀결인 것은 분명했지만, 원래 보수적이었던 루터는 이를 급속히 실행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 소요는 루터가 바르트부르크에서 돌아온 뒤 진정되었지만 그 여파는 1522년 ‘기사(騎士)의 난’과 농민전쟁(1524∼1525년)으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루터는 한편으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재세례파(再洗禮派)와 싸우는 양면작전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6세 연하의 전직 수녀와 결혼을 하다


당시 유럽의 정치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독일과 스페인을 지배하고 있던 카를 5세는 로마 교황과 손잡고 근대국가로 급속히 부상한 프랑스와 싸워야 하는 한편, 동쪽으로는 튀르크의 침입을 경계해야 하는 어려운 입장이었다. 카를 5세는 독일 제후들의 지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신봉하는 루터의 개혁 운동도 일방적으로 억누를 수 없었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과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카를 5세는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독일 양 진영의 화해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531년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한 프로테스탄트 측 제후들과 황제와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 간의 장기간 내전이 시작되었다. 그 사이 루터파 교회는 독일 각지에서 꾸준히 성장했다. 루터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은 하느님께 반항한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죄를 용서받아 ‘자유로운 군주’이자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모든 직업은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1525년 6월 13일 루터는 결혼식을 올리는데, 그의 결혼도 종교적 신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신부는 16년 연하의 전직 로마 가톨릭 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년)였다. 루터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그들은 루터가 결혼하면 온 세상과 사탄이 웃을 것이며, 그동안 이루어놓은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다고 걱정했다. 특히 농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의 혼인 선언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강한 신념은 이런 염려에 전혀 굴하지 않았다. 루터는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되자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처음에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농민전쟁에 대해서도 나중에는 복음을 독재 체제로 왜곡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이라고 보고 영주들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했다. 이렇게 종말이 왔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결혼을 결심한 것이다. 종말에 하느님이 오면 인간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 루터는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것이 사탄에게 대적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루터의 이와 같은 생각이 개신교 성직자들의 결혼을 당연시하는 결과를 낳았음은 물론이다.

1530년대에 이르러 루터는 누구보다도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대중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엄청나게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세상을 뜨기 전 마지막 몇 년 사이에 평생 쓴 편지의 3분의 1을 쓸 정도로 많은 편지를 써야 했으며, 생애 마지막 날까지 분쟁을 중재하느라 분주했다. 마침내 온 생애가 혁명 그 자체였던 사나이 마르틴 루터는 1546년 63세의 나이로 자신이 태어난 아이슬레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장례식에서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은 종교개혁가 필립 멜랑히톤은 찬가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루터는 구약시대부터 교부들로 이어지는 자랑스러운 스승과 예언자 반열에 드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넵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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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 Martin Luther ]


출생.사망: 1483.11.10 ~ 1546.2.18

출생지: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

주요저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1520>, <로마서 강의. 1515∼1516>


​요약: 독일의 종교개혁자이자 신학자. 면벌부 판매에 '95개조 논제'를 발표하여 교황에 맞섰으며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독일어 통일에 공헌하였으며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써 '루터파 교회'를 성립하였다.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벌부(免罰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破門勅令)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領主)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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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터 [ Martin Luther ]


요약: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에 반기를 든 독일의 종교개혁자.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폐쇄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성경을 통한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접촉과 하나님의 구원을 설파하였으며,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대중화에 기여함

출생. 사망: 1483~ 1546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그가 그의 아버지의 염원대로 법률가가 되기 위하여 에르푸르트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집에 잠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벼락이 그의 바로 옆에 떨어졌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서 신부의 길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성서를 중심으로 진지하게 공부하였고 그것은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부패하여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폐단이 심했다. 루터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비텐베르크 성의 만인성자교회의 문 앞에 '95개의 논제'를 붙여놓았다. 이로써 그는 가톨릭교회와 전면적인 대립으로 치달았으며, 이 95개의 논제는 대중에게도 폭발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루터는 교회가 인간의 죄를 면하거나 구원할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섬김과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십자가 신학'을 주장했다. 루터가 이렇듯 가톨릭교회를 비난하자 교황은 그를 이단 재판에 참석하라고 로마로 소환하였으나 프레데릭 선제후와 대학이 이에 반대하였고 대신 카예탄 추기경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를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심문에서 루터는 모든 인간들은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성서가 가장 높은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추기경은 프레데릭 선제후에게 루터를 로마로 넘기거나 영지로부터 추방하라고 말하였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루터를 보호하였다.


1519년에는 라이프치히 논쟁이 일어났다. 엑크와의 논쟁에서 루터는 이전의 주장처럼, 인간은 잘못 판단할 수 있으며, 인간을 구원해 줄 대상은 같은 인간인 교황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인간에서 교회의 우두머리임을 역설하였다. 이 논쟁으로 루터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더이상 공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교황은 교서 <Exurge Domine(주여! 일어나소서!)>에서 60일 안에 루터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또한 루터의 모든 저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루터는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와 로마 교회의 법전을 불태웠다. 결국 1521년 1월 3일 루터는 최종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파면당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 로마교회로부터 파문당하는 것은 보호의 테두리 밖으로 쫓겨나는 것과 다름 없어 매우 위험하였다. 독일의 영주들은 보름스 국회의 청문회에서 루터가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게 해주었다. 카를 5세 황제는 신변 안전을 보장하며 보름스로 오도록 초청하였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루터는 보름스로 갔다. 루터는 그 청문회에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카를 황제는 3주 이내로 보름스를 떠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름스에 있을 동안에는 신변을 보호해주었다.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자, 황제는 루터를 법에서 추방하였다는 칙령을 내렸다. 이제는 누가 그를 살해하거나 상해하여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게 되었다.


위험해진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위장 신분으로 지내며 숨어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라틴어로 되어 있어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었던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이제 대중들은 성직자라는 중간자 없이 자유롭게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성서를 번역하면서 사용한 독일어는 현대 독일어의 표준이 되어 독일어를 통일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심에 있던 루터는 그러나 농민전쟁이나 에라스무스와 같은 인문주의자들과 차츰 구별을 지어갔다. 그는 검소하고 경건한 종교적 환경을 만들고 이끄는 개혁 활동을 계속해나가면서 성서 강의, 설교 등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정치와 결합한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역시 지배세력과 결탁하여 농민전쟁에서 영주의 편을 들었다. 현실적으로 제후들과 결탁하는 것이 종교개혁의 진행에 더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마틴 루터의 한계점으로 지적받고 있다.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루터 [ Martin Luther ]


인간은 신을 선택할 수 있는가?


요약: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횡만큼이나 주관적 신비주의 신앙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세속적인 것과의 철저한 단절도 천년왕국의 혁명적 건설도 그에게는 피해야할 극단이었고, 그만큼 루터의 사상은 혁명적이면서도 동시에 보수적이었다.


출생-사망: 1483년 ~ 1546년, 시대: 르네상스



제도사상사를 돌이켜 볼 때, 종교개혁은 시대적 변화를 초래한 파괴력에 비해 정연한 사상적 체계를 갖지 못한 운동과 논쟁의 연속이었다. 종교개혁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붕괴시켰다고는 하지만, 교회 권위의 추락은 13세기 말 십자군 원정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또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세속적인 정치권력이 부상()되었다고는 하지만, 교권과 왕권의 구분은 5세기 말 교황 겔라시우스 1세(Gelasius I)에 의해 이미 공식화된 바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새로운 정치적 흐름이라기보다 존재하던 여러 균열들이 우연적 계기로 응축되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 사건들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Disputatio, 1517)」이 로마 교회의 전횡에 대한 기존의 반발들을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던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즉 균열들이 이미 존재했더라도 루터가 그것들을 어떻게 인식했고, 특정 국면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어떤 의도로 조직했으며, 그가 누구를 설득하려 했는지가 동시에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루터의 사상을 살펴보기 전,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가능하게 만든 현안들은 무엇이었으며, 이러한 현안들을 정치사회적 갈등의 중심으로 옮겨놓은 힘은 어디에서 추동되었는지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개혁의 토대


세 가지 측면이 특히 부각된다. 첫째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은 15세기 중엽부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인쇄술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사례에서 보듯,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인쇄물이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유통되는 인쇄물의 규모가 수백만으로 확대된 16세기 초, 그것도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이래 인쇄혁명을 주도한 독일에서,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독일어로 번역 출판되어 15일 만에 독일 전역에서 읽혀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즉 1517년에서 1520년까지 루터가 쓴 30종의 저술들이 30만권 이상 팔려나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루터의 종교개혁은 시작부터 그 이전의 위클리프(John Wycliffe)나 후쓰(John Huss)와는 다른 토대를 가지고 있었다.

둘째, 로마 교황에 대한 가톨릭 공동체 내부의 인식이 ‘조정자’에서 ‘참주’로 전환된 것도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하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로마 교황은 성경에서 언급된 ‘베드로의 권위’를 계승했다는 상징적 의미만큼이나 가톨릭공동체 내부의 통일을 가져오는 실질적 역할을 담당했다. 교황은 성경을 둘러싼 논쟁에서 누가 옳은지를 판단하는 기준이었고, 기적이나 예언의 진위를 가리는 재판관이었으며, 가톨릭 공동체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종식시키는, 일종의 합의된 제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합의된 제도로서 교황의 권위는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교황의 명령에 순응하는 오랜 전통을 거부하며 모두가 성경을 해석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퍼졌고, 동일한 이유에서 상징적 권위에 의존해서 파문교지를 남발하는 교황을 ‘참주’로 인식하는 계기를 강화시켰다.

셋째, 종교개혁이 진행되기 훨씬 이전부터 가톨릭 공동체의 분열이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종종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을 마치 기독교 세계의 첫 종파적 분열처럼 이야기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가톨릭 공동체의 분열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 1054년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교회와의 대립은 1439년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다시금 불거졌고, 1378년부터 1418년까지 지속된 서방 교회 내부의 대립은 로마 교회의 권위가 단지 물리적 우위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켜 주었다. 사실 1519년 명예욕에 사로잡힌 에크(Johann Eck)가 로마 교회의 정통성을 앞세워 루터를 비난했을 때, 독일의 젊은 신학자들이 루터의 편을 든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즉 종교개혁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후자가 전자를 가속화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그 이전의 종교개혁의 맹아들과는 다른 토대에 서 있었고, 이러한 토대들은 루터가 제기한 현안들이 순식간에 거대한 운동을 촉발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했다. 게다가 독일은 이러한 종교개혁의 추동력이 극대화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로마 교회의 영향력, 그리고 빈약했던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의 유대도 한 몫을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황이 아니라 성서가 판단기준으로 전제되고, 교회의 위계가 아니라 신앙적 헌신이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되자, 독일인들은 루터의 저술에 열광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꽃피운 르네상스 가톨릭 인문주의와는 달리,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은 오래지 않아 로마 가톨릭교회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금욕적 세계관


인간에 대한 루터의 비관적 견해는 종종 심리학적 정신분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도하리만큼 엄격한 성욕()에 대한 결벽증, 지나칠 정도로 철저한 이성()에 대한 불신, 그리고 안타까우리만큼 처절한 자기()에 대한 실망, 이 모든 주제들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지배욕’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종교적 헌신의 필요성을 도출하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아울러 당시 가톨릭 전통의 ‘자기부정()’적 신앙을 넘어 ‘믿음’(fide)의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우위로 귀결된 루터의 종교관이 어떻게 세속적 정치권력과 시의적절한 협력으로 수렴되었는지도 큰 흥미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루터에 대한 심리학적 궁금증과는 대조적으로, 루터의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그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 작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마침 튀링겐(Thüringen)에서 이주해 왔는데,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제련업에 손을 댄 아버지를 따라 만스펠트(Mansfeld)로 다시 거처를 옮겼다. 그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der)는 농사를 짓다가 광부가 되어 사업가로도 성공하고, 시민 대표로서 주민들의 신망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가끔 루터의 음욕()에 대한 병적 기피가 부모의 지나치게 엄격했던 체벌의 결과라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부모의 훈육이 가혹했다기보다 루터가 회고하는 어린 시절이 수도승의 자책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루터는 만스펠트에서 라틴어 기초교육을 마친 뒤, 1497년 막데부르크(Magdeburg)의 ‘공동생활 형제단’(Fratres Vitae Communis)에서 기독교 교리와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다. 이때 그는 안할트(Anhalt) 공국의 왕자였다가 프란체스코회 수도승이 된 빌헬름(Wilhelm)의 금욕적 삶에 큰 감명을 받는데, 이 시기 경험들은 1498년부터 1501년까지 아이제나흐(Eisenach)에서 받은 교육과 함께 그의 신앙에 주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그러나 에르푸르트(Erfrut)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법학 과목을 본격적으로 이수하기 시작한 1505년까지, 그는 아버지의 소망대로 법률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당시 에르푸르트는 경제적 풍요를 발판으로 ‘작은 로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기에, 그의 성공에 대한 가족의 기대도 그만큼 컸다.

따라서 1505년 7월 17일 루터가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투스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했을 때, 야심만만했던 아버지는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실 1505년 7월 2일 본가에 다녀오는 길에 벼락을 맞아 죽을 뻔 했을 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수도사가 되기로 서언()했다.’는 말은 누구도 납득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확고했고, 그의 아버지도 그의 결정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서언의 진정성을 증명하듯, 종교개혁의 깃발을 든 이후 정적들의 무고()에도 흠을 찾을 수 없었을 만큼 그의 수도원 생활은 금욕적이고 모범적이었다. 게다가 다른 수도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출중한 지식은 당시 주변 대학의 주목을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1507년 루터는 신부로 서품을 받았고, 1509년 3월 9일 ‘성서학사’(Baccalaureus biblicus)를 받기까지 성서연구에 몰입했다. 그해 가을 신학을 강의할 수 있는 ‘신학사’(Sententiarius) 자격을 취득한 후, 1510년에서 1511년 사이 로마에서 개최된 수도원 총회를 다녀온 기간을 제외하고는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피터 롬바르드(Peter Lombard)의 『전거론』(Libri Quattuor Sententiarum)을 가르쳤다. 로마에서 돌아온 후, 그는 바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의 강사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1512년 10월 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의 상관이자 스승이었던 요한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의 뒤를 이어 신학교수가 되었다. 이처럼 루터는 1523년 손수 출판한 사보나롤라의 『명상록』(Meditatio)에 나오는 옥중 고백처럼, ‘허탄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개혁의 시작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 궁정교회(Schlosskirche) 정문에 라틴어로 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나붙었다. ‘면죄부 능력 천명에 대한 반박’(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이라는 원래 제목에서 보듯, 「95개조 반박문」은 교황 레오 10세(Leo X)의 성() 베드로 성당 건축비 충당과 막데부르크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 von Mainz)의 사욕이 빚은 ‘완전 면죄부’ 남발에 대한 토론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여기에서 루터는 7세기부터 통용되어 오던 세속적 처벌의 ‘사면’(indulgentia)이 교회와 성직자의 축재()를 위해 남용됨으로써 ‘면죄부()’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하고, ‘고백성사’(penitentia sacramentali)와 같은 교회의 권위를 통한 참회가 아니라 진정한 영적 회개를 촉구했다. 즉 이때까지만 해도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95개조 반박문」은 그동안 잠재되었던 갈등을 고스란히 노출시켰고, 이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뇌관을 갖고 있었다. 첫째, ‘교황은 어떤 죄도 사()할 수 없다,’(Papa non potest remittere ullam culpam)'는 논제에서 보듯, 루터는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일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실 당시 교황은 가톨릭 공동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지만, 신앙의 문제에 있어 리더십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탁발 수도승들의 거리설교와 신비주의의 만연으로 평신도들의 신앙적 요구는 폭증했지만, 교황은 무차별적이고 자의적인 파문과 이단선고를 제외하고는 지도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교황의 권위를 전적으로 부정하진 않았지만, 루터의 논제는 교황이 무조건 복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부각시키기에는 충분했던 것이다.

둘째, 신앙과 불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은 ‘교회의 진정한 보물(verus thesaurus ecclesie)’인 성서()뿐이며, ‘진정한 기독교인’(verus christianus)이면 누구든지 교회의 모든 영적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이러한 논제들은 중세시대부터 종교적 권위를 지탱하던 성직자와 평신도의 위계를 파괴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라틴어를 읽고 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종교적 권위를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정치권력들이 앞을 다투어 학교와 대학을 설립하고, 인쇄술의 발달과 종이 가격의 인하로 출판이 활성화되면서, 많은 수의 평신도가 성직자의 특권처럼 여겨졌던 ‘성서를 읽고 쓰는’ 활동에 참여할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루터의 논제들은 가톨릭 공동체 내부의 위계에 짓눌린 평신도들의 숨통을 활짝 열어준 것이다.

독일어로 번역된 「95개조 반박문」은 한 달 만에 독일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파급되었다. 그 일차적 효과는 면죄부 판매실적의 급감으로 이어졌고, 성직을 얻기 위해 지불한 막대한 돈을 면죄부 판매를 통해 회수하려던 알브레히트 대주교가 특히 큰 타격을 입었다. 알브레히트가 교황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가 여러 경로를 통해 루터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종교개혁의 깃발이 서서히 올라가게 되었다. 막데부르크 교구의 면죄부 판매를 맡고 있던 텟젤(Johann Tetzel)의 루터에 대한 비판을 비롯해, 양측의 치열한 유인물 공방은 오히려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 사제단 모임, 1519년 라이프찌히에서 열렸던 에크와의 토론, 1520년 교황의 소환에 대한 불응, 1521년 교황의 파문교서와 카를 5세에 의한 자격박탈, 이 모든 것들은 종교개혁의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새로운 신학

처음부터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루터의 신학은 기존의 가톨릭 전통과는 다른 특성들을 속속 드러냈다. 특히 1520년 10월 10일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라는 제목의 교지가 교황으로부터 전달되기 직전 자신의 신앙고백을 담은 「그리스도인의 자유」(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menschen, 1520), 그리고 에라스뮈스의 공개적 비판에 대한 답변의 일환으로 집필된 「구속된 의지」(De Servo Arbitrio, 1525)는 루터 신학의 독자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과 ‘오직 은혜’(sola gratia)로 대표되는 루터의 입장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이나 가톨릭 인문주의 사상과 융화될 수 없었던 이유들이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으로 시작한다. 이 서한에서 루터는 교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하고, 자신은 교황이 아니라 교황청(Curia Romana)의 부패한 성직자들을 비판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글에서는 교황의 압력에 결코 굴복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이 피력된다. 크게 두 가지 주장이 전개된다. 첫째, 신과 인간의 ‘친애(:amicitia)에서 비롯되는 믿음을 바탕으로 선행(:bonitas)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리를 거부한다.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구원은 신과 인간의 관계나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신의 일방적 은혜에 기인하고, 인간은 오직 이 은혜에 대한 신의 약속을 ‘붙잡는 믿음’(fides apprehensiva)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즉 그는 스콜라 철학의 ‘사랑으로 형성된 믿음’(fides caritate formata)을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된 믿음’(fides Christo formata)으로 대체한 것이다.

둘째,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합일()된 기독교인은 그 누구에게도 복속되지 않으며, 동일한 근거에서 ‘모두가 왕이자 제사장이다.’라는 ‘만인() 제사장주의’를 역설한다. 먼저 루터는 구약성서에서 제시되는 율법과 신약성서에서 구원의 약속을 대비하고, 전자를 온전히 이행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은 후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그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약속의 말씀이 실현되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합일된 기독교이라면 누구든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영적인 권면을 할 수 있다.’고 부언한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모든 사람의 종복(,dienstbarer Knecht)이어야한다.’는 성서의 가르침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기에 ‘만인 제사장주의’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이러한 주장들은 「구속된 의지」에서 에라스뮈스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의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발전한다. 1524년 에라스뮈스는 루터가 믿음을 앞세워 교회질서를 부정한다고 판단되자, ‘자유의지’(libero arbitrio)를 전면에 내세우며 자제를 촉구했다. 그리고 그는 루터와 같이 ‘믿음’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결국에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완전히 배제하는 비()이성적 신앙으로 귀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3 사실 1521년 작센의 츠비카우(Zwickau)에서 벌어졌던 일처럼 루터의 저술에 자극을 받아 신으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이들 중에는 신의 은총으로 받은 지식이 있기에 성경을 공부하는 것조차 불필요하다고 선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라스뮈스는 개혁의 필요는 공감했지만, 루터의 ‘믿음’ 지상주의에 내재하는 반()지성주의가 불편했던 것이다.

사실 루터는 가톨릭 인문주의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있었다. 「구속된 의지」에서 보듯, 그는 인간이 이성적 선택을 통해 신의 구원에 ‘동참’(cooperatio)할 수 있다는 가톨릭 인문주의자들의 전제를 못마땅해 했다. 모든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 신의 은총이 없이는 죄와 사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상태에 있고, 그러기에 사탄에게 완전히 종속된 인간이 신의 사역(使)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신의 명령은 옳다고 판단되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이기에 복종해야 하며, 신의 섭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루터가 ‘믿음’을 앞세운 신비주의 운동을 경계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반()지성주의가 무분별한 성서해석과 비()이성적 집단행동을 자극할 여지가 있었음도 부인하긴 힘들다.


정치와 종교


‘오직 믿음’을 앞세운 루터의 신학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권위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러기에 1519년 6월 28일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카를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고, 같은 날 라이프찌히에서 개최된 에크와의 논쟁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공박한 이후, 루터의 앞날에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누구도 루터를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두려움 속에서 오히려 강해졌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더욱 통렬한 비판을 가하지 시작한다. 이 시기에 작성된 「독일의 기독교 귀족들에게」(An den christlichen Adel deutscher Nation, 1520)라는 연설문에서 보듯,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같은 가시적이고 제도적인 형태가 아니라 ‘신앙 공동체’(congregatio fidelium) 또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모임’(Gemeinde)의 회복을 꿈꾸었다. 이제 그는 ‘교회란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라는 성서적 의미를 실현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다.

실제로 루터는 세례를 통해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별이나 위계도 있을 수 없으며, ‘신의 사람들’(Gottes Volks)에 소속된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의 ‘영적 공동체’의 구성원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사회에서는 세속적 권력과 영적 권위를 구별할 이유가 없다고까지 부언한다. 세속적 정치권력이 기독교인의 손에 들어가 있는 사회에서는 “우리가 그러하듯 세례를 받은 세속적 권위도 동일한 믿음과 복음을 가졌기에, 그들이 사제와 주교가 되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로마 가톨릭교회가 교회법을 앞세워 세속적인 권위의 정당한 행사까지 개입하는 것은 명백한 잘못일 뿐만 아니라, 교황도 주교도 잘못이 있다면 세속적 권위의 처벌을 피할 수 없다고까지 천명했다.

이렇게 로마 가톨릭교회에 도전하면서, 루터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생겼다. 바로 ‘세속적 권력과 기독교 교회와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문제였다. 이는 한편으로는 5세기 말 겔라시우스 1세의 세속적 권위와 영적 권위의 구분을 연상시킨다. 이때 루터의 견해는 로마 가톨릭교회가 세속적인 영역에서까지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을 막고, 교회와 관련된 일이라도 갈등이 있다면 세속적 정치권력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정도의 주장으로 국한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세속적 권위가 종교적 권위보다 우월하다고 결론지어질 요소를 갖고 있다. 루터는 기독교 사회에서도 인간의 사악한 본성으로부터 공공선을 지키기 위해 정치권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결과적으로는 종교적 권위도 정치권력의 올바른 행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가 모두 신으로부터 부여된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루터는 최소한 세속에서의 정치권력의 교회에 대한 우위를 인정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1525년 루터는 토마스 뮌처(Thomas Müntzer)의해 촉발된 독일농민전쟁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이렇듯 그는 교황의 전횡만큼이나 주관적으로 경험된 신비주의 신앙에 비판적이었고, 정치사회적 차별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지만 급진적 신앙운동이 가져올 병폐에 대해서도 민감했다. 다시 말하자면, 세속적인 것과의 철저한 단절도 천년왕국의 혁명적 건설도 그에게는 피해야할 극단이었고, 그만큼 루터의 사상은 혁명적이면서도 동시에 보수적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on)이나 칼뱅(Jean Calvin)과 같이 루터의 혁신에 공감한 신학자들은 혁명적 파괴력을 순화할 새로운 제도를 고민했고, 키에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와 같이 보수적인 측면에 불만을 가졌던 사상가들은 루터가 지나치게 세속적이었다는 비판을 멈출 수 없었다.


<정치철학 다시보기> 中, 루터 [Martin Luther] - 인간은 신을 선택할 수 있는가?


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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